아침에 지난주에 끝났던 오암마을로 향했다. 조금 늦은듯 하여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차를 몰았다. 다행이도 몇사람 도착하지 않았다. 지난 3차 고원길의 구간을 나타내는 지도엔 오늘 걸어가는 길이 잘 나오진 않았다. 오늘 가는길은 오암마을 - 3.7km - 추동(고원길 디자인) - 2.1km - 신동 - 신동마을회관(점심식사) - 3km - 판치고속도록 - 3.3km - 서판사거리 까지 총 12.1km 구간이다.
오암마을길을 걷다보니 담벼락에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환해졌다.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고싶은 마음이 든다. 일행중에 함께 촬영하는 분들도 보인다.
오암마을을 출발한 우리는 더웅골의 언덕(황소마재)을 올랐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이 계속되자 뒤쪽에서 "날 죽여라 ~" 하는 쎈 소리가 들린다. 뒤 돌아보니 우리 일행중 나이가 제일 많은 어머니께서 외치는 소리다. 나이도 많은데 가파른 길이 계속되자 힘이 드셨던 모양이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걷는 내내 양옆으로 시원한 경관을 제공해 준다.
예전엔 저기 보이는 공사중인 곳으로 다녔다고 하는데 지금은 양계장이 들어서는지 대규모 공사중이다. 외부에서는 이곳을 전혀 볼 수 없는 장소다. 이렇게 고원길을 걷거나 하늘에서 보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곳에 대규모 축사가 들어선다. 대부분의 축사가 들어서는 배경은 비슷하다. 소, 돼지, 닭 등을 대량으로 키우다 보면 분뇨에서 나오는 악취와 침출수의 대책이 가장 큰 골치거리다. 제대로 처리시설을 갖춰서 하자니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든다. 따라서 대부분은 처리시설 시늉만 하고 실제로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지나면 이곳은 악취와 토양오염으로 자연환경이 파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농민은 농사보단 축사가 돈벌이가 좀 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쌀 소비보다 소, 돼지, 닭고기를 선호하는 한 변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대량사육을 하는 축사가 늘고 있고 우리의 국토는 병들어 간다. 그래서인지 이런 축사는 으슥하고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곳, 특히나 산 중턱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 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개인이 알아서 해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맨날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민생을 돌보는 일에 정책적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 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개인이 알아서 해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맨날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민생을 돌보는 일에 정책적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언덕 정상에 오르니 탁 트인 시야가 시원하다. 금방 수확을 한 듯한 고구마 밭엔 미처 걷어가지 못한 고구마들을 볼 수 있었다. 멀리 마이산이 보인다.
어떤이는 마이산의 이 모습을 보고 엄마가 아이를 엎었다고 표현한다. 앞에 크게 보이는 암마이산 뒤로 숫마이산이 삐죽이 얼굴을 내밀었다.
고개길을 넘어 내려오니 여기서부터는 마령면이다. 내려와 다리건너 마을은 장재동마을이다. 장재동에서 추동마을로 가는 길은 울긋 불긋한 꽃길로 장단이 되어있다. 장재동은 한말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로서 어은동과 같은 무렵 이루어졌다. 지금도 천주교 공소가 있다. 처음에는 생업으로 옹기를 굽고 살았다고 한다. 추동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다.
장재동 공소는 마령면 덕천리 장재동 마을 입구에 있다. 장재동은 본래 공소가 있던 마을로 천주교 교우촌에 해당되는 곳이다. 장재동은 어은동과 같은 무렵에 조성된 마을인데, 약 100년전 박해를 피해 신부가 피신하였고, 박해를 피하여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이기도 하다. 이곳은 하천의 최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관군의 눈에 띄기 힘들었고 남쪽으로는 성수면 중길리와 인접해 있어 유사시에는 그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박해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천혜의 피난처였다. 현재의 공소는 1964년 본래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추동은 본디 가래골이라 불렸으나 한자의 뜻을 취하여 추동이라 고쳐 불렀다. 만덕산 줄기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남동쪽으로 트여 있다. 북서쪽 골짜기 물이 덕천저수지로 유입되었다가 마을 앞으로 흘러 덕천천(추동천)을 이룬다. 추동마을은 마을 뒷산 큰 소나무가 있는 곳이 제비집이라 불리며 동네에서 묘를 못 쓰게 한다.
이마을의 마을숲은 두군데 있다. 마을회관 앞 개천가 제방에 조성된 느티나무 다섯 그루는 서쪽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수류의 범람을 방비할 목적으로 보이며, 또 하나는 마을어귀(동남향) 서쪽 물과 북쪽 물의 협수가 합수하는 지점에 네 그루의 아카시아나무로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양생파(養生破)로 손명(損命)을 방비하려는 조처로 보인다.
추동마을 입구 모정에 모여앉아 영자누님께서 싸오신 동그랑땡과 송팀장이 싸온 가래떡에 꿀을 찍어 먹고 나무목걸이를 만들어 모정에 걸어 두었다. 추동마을을 지나 신동재를 넘기시작했다. 앞서가던 어떤 누나가 비명을 지르며 기겁하고 뛰어온다. 뱀을 본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 뱀이 팔짝팔짝 뛰며 질러대는 비명소리에 당황했는지 이리가다 저리가다를 반복하여 어쩔줄 몰라한다. 옆에있던 한 분이 지팡이로 꼬리부분을 건들어 숲으로 도망가게 했다. 사람보다도 뱀이 더 놀란듯 하다. 어찌나 놀랐던지 길고 구불구불한 것만 보면 뱀같이 보인다고 호들갑을 떤다.
옛날 불가에서는 살생을 하기 않기위해서 짚신도 느슨하게 만들어 신었다. 개미며 곤충들이 짚신의 느슨한 틈사이로 빠져 사람의 발길에 밟혀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또 길을 갈때 주환장, 또는 육환장으로 땅을 치고 다녔다. 육환장의 땡그랑 하는 소리와 땅울림 소리로 앞에 있던 생물들에게 사람이 가는 길을 알려 미리 피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옛날 불가에서는 살생을 하기 않기위해서 짚신도 느슨하게 만들어 신었다. 개미며 곤충들이 짚신의 느슨한 틈사이로 빠져 사람의 발길에 밟혀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또 길을 갈때 주환장, 또는 육환장으로 땅을 치고 다녔다. 육환장의 땡그랑 하는 소리와 땅울림 소리로 앞에 있던 생물들에게 사람이 가는 길을 알려 미리 피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신동재를 넘어 신동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곳 마을회관에서 싸온 도시락과 주최측에서 준비한 김치찌게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쉬었다.
신동마을은 예전에 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만들었다 하여 놋점터, 또는 유기점리라 불렀으나 놋점이 없어진 후, 1800년경부터는 나뭇골이라는 뜻의 신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90년 초까지만 해도 당산제를 지냈는데, 신동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마을 북쪽 노림터골 기슭에 위치한 도기요지는 마을에서 북쪽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다. 가마가 위치한 곳은 대나무밭 주변일대로 이곳엔 많은 양의 도기편과 가마폐기물이 산재해 있다.
신동마을은 예전에 이 마을에서 놋그릇을 만들었다 하여 놋점터, 또는 유기점리라 불렀으나 놋점이 없어진 후, 1800년경부터는 나뭇골이라는 뜻의 신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90년 초까지만 해도 당산제를 지냈는데, 신동마을에 교회가 들어서고 신자가 늘어나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마을 북쪽 노림터골 기슭에 위치한 도기요지는 마을에서 북쪽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다. 가마가 위치한 곳은 대나무밭 주변일대로 이곳엔 많은 양의 도기편과 가마폐기물이 산재해 있다.
[담장너머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길가는 여행자를 바라보고 있는 다알리아]
판치재를 넘어 판치저수지를 지나 익산포항고속도로 밑으로 이어지는 길로 향했다. 서촌은 사학(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서촌마을 어귀에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서촌마을에서는 정월 열 나흗날 저녁에 거리제를 지낸다. 마을 윗쪽으로 태고종 성지암이 자리하고 있다.
판치재를 넘어 판치저수지를 지나 익산포항고속도로 밑으로 이어지는 길로 향했다. 서촌은 사학(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서촌마을 어귀에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서촌마을에서는 정월 열 나흗날 저녁에 거리제를 지낸다. 마을 윗쪽으로 태고종 성지암이 자리하고 있다.
내동재를 넘어 서촌으로 향하던 중간 산속에 자리잡은 전옥례 묘소(전봉준의 큰 딸)를 방문했다.
원래대로라면 전옥례님의 손자인 이승종님을 모셔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어르신께서 일정이 내일 인 줄 아시고 다른 곳에 가셨다고 한다.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친딸인 전옥례 씨의 묘소에는 동상과 함께 묘비가 세워져 있다. 갑오혁명으로 부모를 잃은 전옥례 여사는 천혜고아로 유랑하다가 마이산 금당사에 들어가 전옥연으로 이름을 바꾸고 공양주 생활을 했다. 이후 23세에 경주이씨인 이찬영선생과 결혼하여 5남 2녀를 두었다. 우여곡절끝에 진안군 부귀면 희망목장으로 왔을때 전봉준의 딸임을 안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숨어살던 때라 숨기고 지내왔지만, 어느날 국민학교 교과서에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가 실린것을 보고 이제는 자신이 전봉준의 딸임을 세상에 알려도 되겠다고 해서 세상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뒷면에는 이러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있다.
보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링크참조(http://blog.naver.com/someday1986?Redirect=Log&logNo=50092933108) - 진안신문 기사
보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링크참조(http://blog.naver.com/someday1986?Redirect=Log&logNo=50092933108) - 진안신문 기사
오늘의 일정은 판치를 지나 서판 사거리에서 마무리 지었다. 다음주는 이곳에서 시작이다. 일부 구간중 골프장을 지난다고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