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는 이는 고원길 두번째는 전라북도산림환경연구소에서 부터 시작됐다. 오늘은 10월 5일이다.
내동산아래에 있는 산림환경연구소는 탁트인 경관이 일품인곳에 자리잡았다. 다만 내동산 자락에 터를 잡아 일부 인위적인 조경시설을 위해서 자연경관을 훼손한 부분이 눈에 걸린다. 산림환경연구소가 산림환경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며, 수려한 내동산과 어울리는 경관이나 조경을 생각해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내동산아래에 있는 산림환경연구소는 탁트인 경관이 일품인곳에 자리잡았다. 다만 내동산 자락에 터를 잡아 일부 인위적인 조경시설을 위해서 자연경관을 훼손한 부분이 눈에 걸린다. 산림환경연구소가 산림환경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며, 수려한 내동산과 어울리는 경관이나 조경을 생각해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내동산은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에 위치한 산이다(고도:887m). 군의 구신리와 도통리 · 백운면 덕현리 및 마령면 계서리의 경계에 있다. 백운면 덕현리 동산 마을에서 출발해 내동산을 오르면 내동산 폭포가 있으며, 옆에는 약수암이 있다.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서』 등에 '내동산(內洞山)'으로 기재되어 있다. 『진안지』에는 "가장 높은 산봉우리의 형세는 대들보를 걸쳐놓은 듯하다. 예전에 선인(仙人)이 있어 그 위에서 노닐었다고 해서 봉래(蓬萊)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일명 백마산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백색신마가 나타나 그 위에서 노닐었다고 하여 고을 이름을 마령(馬靈)이라 하였다. 산의 서북봉 위는 봉수대 자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지명총람』(진안)에 이전에 백색신마가 내왕했다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제일 먼저 도착한 산림환경연구소의 아침 풍경은 일에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하기엔 최고였다. 탁트인 경치와 상쾌한 아침공기 그리고 따스한 햇살까지...먼저 도착해서 사람들이 오기까지 30여분간의 고요한 아침 시간은 내 몸과 마음을 충분히 쉬게 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도착했다. 출석 채크를 하고 다함께 모여서 고천문을 읽고 출발했다. 오늘은 누군가 데려온 강아지 두마리도 함께 길을 걷는다.
이번 구간은 산림환경연구소 - 3.1km - 원구신마을 - 2.7km - 상염북마을 - 점심(상염북 마을회관) - 4.3km - 쉼터 - 3.8km - 중평마을 까지 총 13.9km다.
걷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도착한 곳은 내동산 아래에 있는 상서마을이다. 모두을 일하러 나갔는지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상서마을은 지난 첫번째 걷기의 종착지점인 원덕현마을의 위쪽에 있는 마을로 상덕현과 서당뜸(서촌)을 합한 행정리명이다. 상덕현은 원덕현과 같은 마을로 덕고개라 불리다 상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덕현리 제일 위에 위치한 마을이다. 서촌은 서당이 있었던 자리라 하여 서당뜸이라 불리다가 서촌으로 불린다.
상덕현에서 원덕현을 거쳐 덕고개인 구신치를 넘는다.
백운면 덕현리와 성수면 구신리를 잇는 고개로 '덕고개'라고도 부르는 구신치는 걸어다니던 시절 백운사람들이 임실장과 관촌장을 오갈 때, 또 가마타고 시집을 갈 때 이용하였다고 한다. 정상까지 임도가 있으나 경사가 심하여 차량통행은 어렵다. 정상에서 구신치 방향으로 내려가면 남근석을 상징하는 바위가 세워져 있다. 해발 410m이다.
백운면 덕현리와 성수면 구신리를 잇는 고개로 '덕고개'라고도 부르는 구신치는 걸어다니던 시절 백운사람들이 임실장과 관촌장을 오갈 때, 또 가마타고 시집을 갈 때 이용하였다고 한다. 정상까지 임도가 있으나 경사가 심하여 차량통행은 어렵다. 정상에서 구신치 방향으로 내려가면 남근석을 상징하는 바위가 세워져 있다. 해발 410m이다.
구신치 푯말 앞에 과연 바위가 하나 솟아 있는데, 이것이 남근석이라고 한다. 이 남근석은 그 시절 사람들은 지금처럼 의술이 발달되지 않았고 여러가지 질병과 동물들의 공격에 의해 수명이 짧아 다산을 상징하는 남근을 경외시 했던 흔적으로 보인다.
구신치를 넘어 원구신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중앙에 우물이 있다. 지금은 비록 마시는 물로는 사용하지 않지만 빨래를 하거나 배추나 야채등을 씻는 물로는 충분하다고 한다. 깊지는 않지만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라며 마을주민은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원구신마을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한 후 임실 상이암에서 진안 속금산으로 가다가 신하를 구하였다고 해서 구신리(求臣里)라 불렀고 이 구신리 관내에서 맨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해서 원구신이라고 유래한다고 하지만 옛 기록에 구신리(求神里)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신빙하기 어렵다. '원구신 사람은 송장도 무겁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지형상 물 대기가 좋아 수확량도 많고 품질도 좋기로 유명했다. 마을 앞에는 동뫼라 불리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고 모정 옆에는 노적바위가 있는데, 어느날 하늘에서 벼력을 쳐서 바위가 갈라져 그 안에서 장군이 소를 몰고 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마을 주민은 바위갈라진 밑 공간에 음식물 저장창고로 사용한 바 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정자나무가 있는데 예전에 마을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하여 이곳을 숲정이라 부른다.
원구신 마을을 뒤로 하고 상염북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누렇게 익어가는 풍광과 파란 하늘의 조화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고원길은 노란색과 보라색의 리본을 가는 길에 묶어 둔다. 행여나 당신이 가는 길이 고원길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상염북마을에 도착해서 나무판에 글을 남기는 작업을 참가자들이 다 함께 했다. 고원길을 걸으면서 하나씩 마음을 담은 글을 나무판에 그리고 상염북 마을에 걸어두기로 했다. 우선 작업을 하고 말리는 동안 마을회관에서 각자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상염북 마을에선 농사일로 바쁜 와중에 김치찌게를 맛나게 끓여 내어 주셨다.
나도 마음을 담아 멋찌게 작업해보려고 했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가진 못한다.
상염북 마을에서 떠나기전 간단한 자기소개시간을 갖고 이장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길을 떠났다. 이 마을은 행정리명은 염북인데 상염북과 하염북을 합한 지명이다. 상염북마을의 느티나무는 경술년 한일합방 때 북쪽으로 쓰러졌다가 3년 후 일어났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마을의 이름도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생각염(念)자와 북녁북(北)자를 써서 염북이라 부른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전의 고문헌에도 염북리(念北里)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지어낸 얘기로 보인다. 하염북은 예전에 백운에서 관촌방면으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촌이었다.
상염북 마을에서 떠나기전 간단한 자기소개시간을 갖고 이장님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길을 떠났다. 이 마을은 행정리명은 염북인데 상염북과 하염북을 합한 지명이다. 상염북마을의 느티나무는 경술년 한일합방 때 북쪽으로 쓰러졌다가 3년 후 일어났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마을의 이름도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생각염(念)자와 북녁북(北)자를 써서 염북이라 부른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전의 고문헌에도 염북리(念北里)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지어낸 얘기로 보인다. 하염북은 예전에 백운에서 관촌방면으로 가는 길목으로 주막촌이었다.
점심을 먹고 30분정도 오침을 하고난 후 걷는 길은 산을 휘감아 도는 임도로 이어진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곳곳에 떨어진 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호주머니에 한가득 주웠다. 쑥부쟁이며 구절초가 환하게 피어있는 길을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임도를 따가 걷다보면 앞으로 걸어야 할 마을들과 길을 한눈에 내려다 보기도 한다. 오후에 걷는 임도길 8km는 걷는 내내 비슷한 장면이 계속되어서 어찌보면 조금 지루해 할 수 있을것도 같지만 중간에 날망에 올라 멀리 임실 백련산까지 보이는 시원한 조망으로 상쇄되기도 한다.
오늘의 일정은 중평마을에서 13.9km의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끝이 났다. 다음에 이곳에서의 시작을 기약해 본다. 중평마을은 신라시대 월랑현의 터라고도 하며 당시에는 중현을 이루었다 하여 중평이라 불렀다. 마을은 배 형국이다. 마을에서는 마을앞 밭 솔정지라 부르는 솔밭을 돛대로 인식하여 돛대봉이라 부른다. 그리고 마을 뒤에는 닻의 역할을 하는 배거리봉이 있다. 중평마을은 전라좌도 풍물굿인 중평굿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중평굿 전시관도 마련되어 있다. 마을의 당산목으로 수령 300년, 높이 11.5m 둘레 3.5m의 느티나무가 있고 그 옆에는 고려시대 요지로 추정되는 옹기 등이 나왔다고 하며, 마을내에 중평 도요지가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 초기 청자 도요지였고 이곳의 도요지는 이미 널리 알려진 곳으로 마을내 거의 모든 주택 마당이나 담장 주변에 청자편 등이 널려져 있다. 특히 마을내 모정 주변으로는 갑발퇴적이 구릉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불에 탄 벽돌이 채집되고 있어 요지가 벽돌가마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날 주워온 밤을 삶아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올 해처럼 한곳에서 밤을 많이 먹어보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