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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미소의 나라 라오스(6) 천년의 고도 루앙프라방

성덕 2016. 11. 15. 22:24

순박한 미소의 나라 라오스(6) 천년의 고도 루앙프라방

천년의 고도 루앙프라방
루앙프라방은 라오스 통일 왕국인 “란쌍왕국”(1353-1975)의 수도였으며, 비엔티엔에서 350km 북부에 위치한 도시다. 우리의 경주와도 비슷한 이 도시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가옥, 사원 등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문화적 가치가 있어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적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온 도시가 사원으로 둘러 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 문화 유적 탐사자, 관광객이 많이 찾는 루앙프라방에서는 2층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없고 봉고차 종류 이하로만 시내를 통과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루앙프라방의 사원
사원마다 특징이 있다. 스님들은 불상조각기술, 그림을 배우거나 영어수업을 배우기도 한다. 사원에서 실습기간이 끝나는 스님들은 사원들의 보수공사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라오스의 사원은 교육기관이다. 사원이 시내곳곳에 자리 잡고 있고 일반인들이 들어와서 출가하고 다시 나가고 할 수 있게 문이 개방되어 있다.
<공양중인 사원의 스님들>
<빨래를 해서 널어둔 모습>이처럼 사원이 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하게 된 일화가 있다고 한다. 
옛날 어느 중부지방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인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안 듣고 나쁜 짓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가슴에 목을 박는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을 내가 받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여느 날과 같이 아들이 나쁜 짓을 하고 들어온 어느 날 아침 아버지 방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심이 갔지만 아들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또 밖에 나가 나쁜 짓을 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스님이 이 소식을 듣게 된다. 스님은 아버지를 만나 아들을 사람 만들어 놓겠다며 아들을 데리고 사원으로 들어갔다. 아들은 3년의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죽음을 통보받게 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들은 슬퍼하며 마을까지 뛰어갔다. 아버지의 흔적을 느껴보려고 아버지의 방문을 여는 순간 방안엔 온통 못자국과 핏자국이 많았다. 그것을 본 아들은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하게 됐다. 그것은 그동안 아들이 잘못할 때마다 아버지가 내 가슴에 못을 박는구나 생각하고 자리에 못을 하나씩 박았다고 한다. 절로 들어간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스님생활을 잘한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흐뭇해서 박았던 못을 손으로 하나씩 뽑았는데 그로인해 바닥에 핏자국이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 ‘아들아 훌륭한 스님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기쁘다. 나중에 훌륭한 큰스님이 된다면 우리가족처럼 못 배운 사람들을 위해서 학교를 세워라’라고 해서 그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학교가 하나씩 생겼다는 이야기다. 
왓 씨앙 통(Wat Xieng Thong)
이 사원은 루앙프라방의 대표적인 사원으로 1560년 쎗타티랏왕에 의해 지어졌다. 메콩강과 칸강 사이에 있는 이 사원은 외부 벽에 불가사의한 삶의 나무라고 불리는 모자이크형태의 모양이 특이하다. 씨앙통이란 의미가 금으로 된 도시 임을 의미하듯 금으로 장신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체적인 건축 구조는 이곳 루앙프라방의 전통건축양식에 따라 지붕의 처마가 땅 밑까지 길게 늘어지는 형태이다.
<왓 씨앙 통의 외부 모습, 여러건물이 있지만 우리나라 사찰의 대웅전 격이다.>
<왓 씨앙 통에 모셔진 불상>라오스에선 만12살이 되면 부모의 동의로 사원에 들어올 수 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사원에서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교육시켜준다. 학교가 생기기 전엔 동남아 모든 사원에서 학교의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사원에 자유롭게 출가했다가 돌아왔다가 할 수 있다.
<왓씨앙통사원에 모셔진 불상>
<왓 씨앙 통의 외벽엔 금으로 그려진 벽화가 화려하다>
<이 건물안엔 실제로 왕의 시신을 옴길 때 사용되었던 배모양의 운구가 있다.>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운구, 여러마리의 용이 끌고 있는 반야용선이라고 해야할것 같다.>
<내부에 있는 불상>
<왓 씨앙 통에서 눈여겨볼만 한 것은 외부 벽에 불가사의한 '삶의 나무'라고 불리는 모자이크형태이다.>왕궁박물관
루앙프라방의 도시가 우리나라의 경주 같이 고대도시로 이 박물관은 필히 볼 필요가 있다. 과거 왕궁으로 쓰이던 건물이었지만 라오스가 1975년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당시 이 왕궁에 살던 ‘사왕왓따나’는 라오스 북부로 유배되었고 그때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유배된 왕의 아버지인 ‘씨싸왕윙’왕의 재위 시절인 1904~1909년 사이에 지어졌다. 따라서 당시 사용하던 각종 왕실의 유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고, 주변국에서 들여온 각종 불상과 선물들도 볼만하다. 박물관의 입장은 반바지와 민소매는 안 되고 내부 사진촬영은 안된다니 주의해야 한다. 가지고간 소지품을 맡기는 장소에 두고 신발을 벗고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내부엔 감시카메라와 감시원이 줄곧 지켜보고 있다.
<왕궁박물관 입구에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사원, 이곳에 태국에 있는 에메랄드불상을 가져와 모실 계획이라고 한다.>
<왕국박물관>
푸씨산
왕궁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100m 정도 되는 조그마한 야산이다. 이곳에 오르면 루앙프라방을 한 눈에 조망 할 수 있다. 이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328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중간쯤에 입장료를 받는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숨이 차지만 올라가서 보는 루앙프라방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푸씨산의 일몰은 장관이다. 푸씨산의 일몰을 보지 않고서는 루앙프라방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낮에 오르기보단 해질무렵 6시 정도에 올라가 조망도 보고 루앙프라방의 일몰도 감상하는 것이 좋다.
<푸씨산에서 바라본 루앙프라방>
<푸씨산의 일몰>
야시장
푸씨산에서 일몰을 보고 왕궁박물관 쪽으로 내려오면 앞 도로에 펼쳐진 야시장을 볼 수 있다. 낮엔 도로로 사용되지만 오후 5시부터 차량통행을 금지하고 야시장이 선다. 입구에는 주로 먹거리 위주의 음식을 팔고, 안쪽으로는 모직물로 제작된 수공예품을 주로 파는데 가격이 저렴하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포즈를 취해주는 아가씨들, 물건은 언제 팔라고..>
<손님이 오던지 말던지 전혀 게의치 않는 라오스 사람들, 손님이 와서 물어보면 그제서야 응대를 하고, 가격을 깍아내려도 꼭 팔려는 생각 없이 자신의 가격 보다 낮다면 그냥 보낸다. 오늘 못팔면 내일 팔면된다는 생각에 잠도 자고 음식도 먹고 참으로 태평이다.>꽝시폭포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유명한 폭포로 시내 중심에서 3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이곳은 석회암질의 버섯모양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매우 아름답다. 폭포 아래쪽은 별도로 수영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폭포로 향하는 입구에는 울타리 안에 있는 곰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폭포까지 이어진 우거진 숲길은 삼림욕을 하기에도 적당하다.
<울창한 숲을 트래킹하는 기분으로 지나면 시원한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소리를 따라 오르다보면 꽝시 폭포를 만날 수 있다.>
<석회암질의 버섯모양의 꽝시폭포는 루앙프라방에서 볼만한 폭포로 하류쪽엔 수영을 할 수 있는 곳도 있다.>빡우동굴
빡우 동굴은 빡우 마을에서 메콩 강변 건너편에 있는 두 개의 동굴을 말한다. 배를 타고 가야하고 루앙프라방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동굴인 빡우동굴엔 수많은 불상이 있다. 처음엔 이곳에 불상을 가져다 놓고 기도하던 곳으로 한 사람 두 사람씩 불상을 들과 와 기도하면서 동굴에 불상이 가득 차게 되었다.
<빡우 동굴은 배를 타고 가야한다.>
<빡우마을에서 메콩강변 건너편에 있는 두개의 동굴, '팀 띵'과 '탐 프라카차이' 두개의 동굴을 묶어서 말하는 것인데, 따로 말하기 어려워서 빡우마을의 이름을 따 빡우동굴이라고 말한다.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므로 조심해야 한다.>
<동굴안엔 이렇듯 수많은 불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이 전부인 빡우동굴엔 일정정도의 돈을 내고 기도를 하는 곳도 있다. 통안에 든막대기를 소원을 빌서 흔들면 떨어지는 막대기에 자신의 점괘가 나온다. 하지만 라오어로 되어있어 가이드로부터 번역을 부탁해야 한다.>
<뭔말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말 같다.><다음에 계속...>